* 소설 해석을 일종의 의사소통으로 간주한다고 할 때 그 특성이 무엇이며 그것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는 최근의 관심사 중 하나이다. 리쾨르는 이 부분에 대해 매우 신중한 따라서 거칠게 말하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아직 밝히지 못한 부분 하지만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이 장은 그에 대한 몇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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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문학 해석의 조건에 관한 이론에서 가다머의 대화 개념이 왜 중요한가를 검토하고 있다. 가다머는 해석을 일종의 대화로 본다. 하지만 문학의 해석은 수신자와 발신자과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함께 지시할 수 있는 일상적 대화와는 다르다. 따라서 이 개념의 타당성과 유용성은 검증될 필요가 있다.
일단 1절의 데리다에 대한 논의. 데리다는 글쓰기를 말과 대조되는 유치한 놀이로 비판한 플라톤의 논의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말이 오히려 글쓰기로부터 파생한다. 글쓰기는 근원적으로 대상과 주체의 부재를 전제하는데 말도 이 부재를 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본다'는 말은 이를 지각하지 못한 다른 사람의 존재, 그 상황에서의 부재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또한 이 말이 보편성을 띠기 위해서는 문장의 '내'가 부재해야 한다. 즉 내 자신이 부재할 때에도 이해될 수 있을 때 이 말은 마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이다.
데리다는 실존의 불투명한 심층 구조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해석(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사상의 기원과 기본 토대를 더 이상 낭만적으로 또는 향수에 젖어 탐색하지 않는 해석을 추구한다. 그에게 해석은 '바닥 없는 장기판'에서 펼치는 유희이다. 그 유희적 서격 때문에 경험의 총체화는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2절 리쾨르의 해석학. 일단 데이빗 호이는 리쾨르가 해석을 대화로 보지 않는 진술들을 비판적으로 나열하면서 리쾨르의 논의에서도 해석의 대화적 성격, 즉 텍스트와 독자의 대화를 읽어낸다. 대화 모형에 대한 리쾨르의 반대는 가다머보다는 해석을 심리화하는 딜타이에 대한 반대라는 것이다. 한편 데이빗은 텍스트가 일차적 지시를 유예함으로써 이차적 지시를 획득한다는 리쾨르의 주장에서 텍스트의 내재성에 대한 긍정을 읽어낸다. 이런 점에서 그는 리쾨르의 해석학을 구조주의적 해석학이라고 부른다.
3절 전용.
필자는 리쾨르가 전유를 선조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리쾨르는 해석학적 순환이 객관적 설명의 시작과 해석적 전용의 끝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있으며 이는 실살 순환적이 아니라 선조적이라는 것이다. 리쾨르는 구조주의를 통해 전용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데 구조주의 또한 하나의 관점이자 입장이라는 점에서 객관적일 수 없다. 해석학적 통찰에 따르면 진리는 방법에 의해서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4절 해석의 역사성
가다머는 '지평의 확산'과 '영향사 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역사적 이해가 주관적인 것도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지평의 확산 : '지평'은 해석의 상황성이나 해석의 문맥 제약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에 의한 하나의 상황에 대한 지각은 그 자신의 상황에 대한 종전의 이해와 항상 결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해석자의 지평은 확산될 수 있어 다른 지평과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낸다.
영향사 의식 : "진정으로 역사적인 사고는 그 사고 자체의 역사성을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지평의 융합은 지평의 화해나 지평 간의 평준화가 아니다. 이 융합은 오히려 지평 간의 긴장을 의미한다. 이 긴장으로 인해 해석자는 해석자의 선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의식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현재와 과거 간의 역사적 차이는 해석자와 텍스트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이는 언어적 차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각각의 세계, 지평의 어떤 특징들을 밝혀주지만 다른 특징들을 은폐하기도 한다. 언어는 특정한 것에 한정되어 있을 뿐, 결코 전체를 노출시킬 수 없는 한,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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