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의 "고향"
풍문으로 많이 듣고 강의를 위해 띄엄띄엄 읽은 것이 전부라 한번 완독하리라 벼르다가 이번에 다 읽었다. 5월부터 읽었으니 두 달이나 걸렸다. 621쪽이라는 긴 분량을 감안해도 너무 게으르게 읽었다. 한 권을 진득하게 읽지 못하고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는 습관때문이다. 좋지 못하다.
좋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인물의 성격이 복합적이고 입체적이다. 김희준이 고향 농민들의 무기력함에 낙담하고 자신의 인텔리 근성을 반성하며 연애 감정에 번민하는 인물이라는 점이 좋았고 농민들이 불합리한 소작 제도에 의해 피폐한 삶을 살면서도 이웃과 다투고 질투도 하며 뒷공론도 하지만 사랑도 하고 두레를 중심으로 화해하는 인물들이라는 점도 좋았다. 다른 소설이라면 악인으로만 그려졌을 안승확도 근대화의 경험과 경제적 논리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다.
그런 점에서 재미있는 작품이다. 김희준이 고향으로 돌아와 청년회를 재건하고 두레를 결성하여 마름인 안승확과 담판을 짓는 큰 흐름 속에서 농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들을 다루는데 인물들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묘사도 핍진하다. 개인적으로는 쇠득이네와 백룡이네가 싸우는 "이리의 마음"에 몰입하였다. 옆에서 구경하는 싸움처럼 생생하고 싸우는 당사자들의 입담도 아래와 같이 대단하다.
정자나무 밑에 앉았던 사람들이 우― 몰려갔을 때에는 두 과부는 밭머리에서 한참 이렇게 두발부리를 하고 나서, 마을로 내려와 가지고 재차로 시작한 싸움판이었다.
이번에는 두 집안 식구들이 편쌈을 벌인 판이다. 거기에는 쇠득이 처 국실이도 누구만 못지않은 강병이었다. 그는 백룡이 처와 상대가 되어 가지고 때로는 그의 모친에게도 좌충우돌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년들아! 늬년들은 부모도 없니? 누구보구 이년 저년 하고 사람을 땅땅 치니? 이 무지막지한 년 같으니!”
“이년아, 너는 누구보구 한데 껴놓고 이년들이라니? 늙은이가 하필 무슨 욕을 못 해서 화냥년이라니? 화냥질하는 걸 어떤 년이 봤니?”
“그년들 화냥질했다 소리가 그리 대단한가베! 이년아, 어미년이 화냥질하다 부족해서 자식년까지 시키면서 그런 소리를 어디서 벌리고 하니? 아가리가 남대문 구멍만해도 못 하겠다.”
쇠득이 모친이 머리꼬리를 감아 얹으며 며느리의 기세를 타서 공세를 취한다. 이 말은 마치 백룡이 모친의 얼굴에 모닥불을 끼얹는 것 같았다. 그는 금시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 가지고 마주 대들며 정가를 한다. 그는 차마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이 바람에 이웃사람들은 백차일 치듯 길거리에 둘러서고 울타리 구멍과 삽짝문 틈으로 구경꾼의 눈은 그들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이년아! 네년은 네 메누리를 얼마나 잘 건사했기에 남의 숭을 보니? 늙은 불여수 같은 년아!”
“이 개 ×으로 빠진 년아! 누구보구 늙은 여수 같다니 내 메누리가 어쨌단 말이냐? 그래 이년아…….”
“저런 늙은 잡년 보았나! 이년아, 너도 메누리를 서방질시켜서 논을 얻지 앉었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더럽다더니 저년이 그쪽일세!”
백룡이 모친은 인제는 독이 올라서 픽픽 웃으며 말하는 게 더욱 무서웁다.
“아이구 저런, 사람 잡아먹을 년 보아! 제년이 그라니까 남두 그라는 줄 알고…… 아이구 저런.”
쇠득이 모친은 기가 막힌 듯이 혀를 차고 발을 구른다. 그러나 백룡이 모친은 여전히 싱글싱글하며 모욕의 소낙비를 퍼붓는다.
“내가 사람 잡을 년이냐? 네년이야말로 그래서 사람을 잡어먹었지! 손자새끼 잡어먹지 않었니? 오장이를 죽이지 않었어? 샛서방을 닮어서 키울 수가 없으니까, 오장이에다가 담어서 실겅에다 얹어 죽이고 무엇이 어째? 수병장수한다기에 그랬더니 고만 죽었더라고, 이년아 어디다가 닭 잡어먹고 오리발 내미는 게야?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을 년들 같으니.”
무당 넋두리 같은 백룡이 모친의 목소리는 마치 경쟁이가 도깨비경을 읽을 때 귀신에게 추상 같은 호령을 하듯이 길게 내뽑는 여음(餘音)이 구경꾼들의 귀에까지 무시무시하게 들린다. 과연 구경꾼들도 처음 듣는 이 말에는 모두 혀를 내두르고 숨을 죽였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의 어느 시점부터 문체가 상이하게 바뀐다는 점이다.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인물의 성격은 평면적으로 바뀌고 행동보다 연설이 앞서고 사건의 흐름도 투쟁과 연애 이야기로 단선화된다. 김희준이 갑숙의 조언을 받아 그녀와 경호의 과거를 빌미로 안승확과의 투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결말은 개인적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이상하여 찾아보니 이기영이 카프 검거로 투옥되면서 고향의 뒷부분에 대한 연재를 김기진에게 부탁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김기진이 35,6회 분량을 뒷부분을 마무리하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행본으로 낼 때도 이기영이 후반부를 고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는데 무엇보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고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끈 이유에 대해 좀 더 분석을 해보고 싶다. 김희준, 안승확을 비롯한 전형적 인물의 집단적 창조, 핍진한 묘사, 적절한 전망의 제시 등 이 작품이 지닌 장점은 많지만 이것만으로 이광수의 "흙"보다 두 배 이상 팔렸다는 이 작품의 대중성을 완전히 해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녀 간의 연애 이야기가 한 몫을 하고 서술자와 인물들의 입담도 즐겼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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